정재현 교수
그리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는 왕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골몰하던 중, 너무 지친 나머지 휴식을 위해 목욕통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물이 넘치는 것을 보았고 목욕탕에서 뛰어나와 ‘유레카’(εὑρίσκω)라고 외쳤지요. ‘아르키메데스의 원리’가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골몰하다가 점점 더 미궁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든 해결해보려고 더욱 안간힘을 쓰게 되는데요. 그럴수록 미궁은 더 깊어지고 해결은 더 멀어집니다. 왜 그럴까요? 문제와 해결이 그 둘 사이의 관계로만 엮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해결을 찾으려고 골몰하면 그 문제는 온 세상이고 전 우주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떤 문제이든지 세상은 그보다는 훨씬 크고 넓습니다. 해결도 문제와만 엮으려 한다면 일시처방이거나 잘못된 판단일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문제와 해결 사이에는 생각보다 훨씬 넓고 큰 세상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에서 빠져나온다면 세상이 보이도록 시야가 넓어지니 오히려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빠져나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만 받아들여도 우리가 해결에 접근하는 태도를 바꿀 수 있겠지요. 이런 대목에서 선현들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문제 해결에 대해 아예 생각하지 않고 있을 때 오히려 해결의 길이 열릴 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발상의 전환을 통해서 미처 하지 못했던 새로운 생각을 일깨워줌으로써 문제 해결에 다가가게 하는 고대 그리스 현자인 헤라클레이토스의 통찰을 ‘망치’라고 풀어낸 로저 본 외호도 이렇게 일러줍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언제 아이디어를 얻는지 물어보았더니 대다수가 문제에서 완전히 손을 놓고 있을 때라고 대답했다.
– 로저 본 외호, <헤라클레이토스의 망치>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과연 복잡한 상황에서 어떻게 손을 놓을 수 있을까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손을 놓게 해주는 것은 앎이 아니라 삶입니다. 앎으로 계산하고 있으면 결코 손을 놓을 수 없지만, 삶은 계산할 수 없는 세상으로 우리를 끌고 가기 때문이지요.
왜 그럴까요? 문제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우리가 알고 있는 영역에만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보다 훨씬 넓고 깊은 삶이라는 차원에서 벌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문제 해결을 위해 더 알려고 애쓰는 과정이 무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고자 동원하는 우리의 앎이라는 것은 실험실의 기자재나 도구 같은 것입니다. 어느 정도 작동하니 유용합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을 확장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으로만 이끌려 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삶을 앎으로 축소시키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결을 위한 아이디어가 제한되거나 아예 나올 수 없기도 합니다.
문제에서 완전히 손을 놓는다는 것은 눈앞에 있는 것을 붙잡고 어떻게든 알아내려는 근시안에서 벗어나 그런 앎의 뒤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모름과 바로 그 뿌리인 없음이 움직일 수 있도록 시간과 공간을 내어주는 일입니다. 여기서 없음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아직 알지 못하는 모름입니다. 그래서 기다리자는 것입니다. 삶이 그런 생리로 우리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완전히 손을 놓고 있을 때 오히려 아이디어가 주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삶의 생리 덕분입니다. 삶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런 삶은 다양한 차원에서 역설적으로 움직입니다. 그러기에 근대 사회사상가 볼테르는 “불필요한 것은 꼭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문제에서 완전히 손을 놓는 일은 해결을 위해서는 매우 불필요한, 아니 대책 없어 보이는 행동이지만, 이것이 오히려 아이디어를 얻을 기회가 되는 것처럼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고대 인생철학자 세네카는 “시간은 우리에게 삶을 주지만, 또 우리의 삶을 빼앗아 가기도 한다”고 했는데요.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 삶은 새로운 시간으로 나아가면서 진행되지만 또한 새로운 시간인 미래는 현재를 거쳐 이내 과거로 사라져 가면서 우리 삶을 빼앗아 가기도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앞으로만 가는 것이 아니라 뒤로 사라지기도 하는 시간의 양방향이 문제와 해결 사이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거꾸로 생각해볼 수도 있게 되고 자연스럽게 발상이 전환될 수도 있으니까요. 아예 생각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라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나 ‘헤라클레이토스의 망치’는 바로 이를 가리킵니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가 짙다”는 괴테의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짙은 그림자만 보고 한탄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림자가 짙다는 것에서 그만큼 빛이 강하다는 것을 거꾸로 떠올리라는 것이지요. “고통을 두려하는 자는 이미 두려움으로 고통 받고 있다”는 몽테뉴의 통찰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고통받을까 하여 두려워하면 고통을 붙잡고 있는 것이니 그것으로 이미 고통은 시작되는 것이니까요. 고통에 대해서도 손을 놓아야 할 이유입니다. “자신이 행복한지 묻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존 스튜어트 밀의 격언은 결정적입니다. 행복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쓸수록 더 어려워지고 더 불행해질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손을 놓을 때 오히려 행복은 선물로 주어진다는 삶의 이치도 망치의 지혜를 확인해주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