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로마 시대에 지어진 대형 아치 건축물이 낡아 무너질 위험에 처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전문가들이 모여 대책 회의를 했는데요. 뾰족한 수가 없으니 사고가 나기 전에 부수자고 하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그때 한 고수가 묘안을 냈는데요. 벌어진 아치 몇 군데에 돌을 올려놓자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펄쩍 뛰었습니다. 그러나 하중을 계산한 고수는 돌 몇 개로 무너질 뻔한 건물을 더 견고하게 만들어냈습니다. 금방 무너질 것 같은 아치에 어떻게 돌을 올리려고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그런데 거기에 돌을 올려놓으면 오히려 더 안전해진다고 합니다. 물론 위치를 잘 잡아야겠지요. 이때 잡는 돌의 위치는 지식과 기술에 의한 것이지만 무너질 것 같은 구조물에 돌을 얹는다는 발상은 삶에서 빚어낸 지혜 덕분일 것입니다.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에서 생사의 갈림길을 거쳐 나온 정신과 의사 프랑클은 그의 극적인 삶을 반영이라도 하듯이 이렇게 전율적으로 말합니다.
금방 무너질 것처럼 약해진 아치에 돌을 더 올려놓으면 안전해지지요. 인간의 영혼도 이처럼 어떠한 한계 내에서는 ‘하중’을 겪음으로써 오히려 더 강건해지는 것 같습니다.
빅터 프랑클, <삶의 물음에 ‘예’라고 대답하라>
참으로 오묘한 삶의 역설입니다. ‘어떠한 한계’라는 조건이 이를 말해 주는데요. 그 안에서라면 더 큰 삶의 무게가 그 영혼을 오히려 더욱 강건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강건해진다는 것에 관심하기에 앞서 한계에 주목해야 합니다. 먼저 겸손하게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이를 정확하게 보고 바로 거기에 돌을 얹어 오히려 ‘하중’을 겪게 합니다. 그리함으로써 강건해진다는 것인데요. 약한 곳에 힘을 주어 누르니 오히려 튼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순처럼 보이는 ‘한계’와 ‘하중’이 만나서 ‘강건’이라는 오묘한 역설을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장애가 남다른 기술이 되기도
같은 이야기를 다른 맥락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린샤라는 브라질의 축구 선수가 있었는데요. 그는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인해, 여섯 살 때 소아마비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오른쪽 다리가 왼쪽 다리보다 긴 불균형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장애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히려 이를 무기로 삼아 축구를 했습니다. 휘청거리는 드리블로 경기장을 뛰어다녔습니다. 기울어진 자세로 뛰다 보니 상대 선수들이 그가 발을 차는 방향을 예상하기 어려웠는데요. 그 덕분에 그는 오히려 더 잘 뛸 수 있었고, 월드컵에서의 우승은 물론 20세기 최고의 축구 선수 중 한 명으로 추앙받았습니다. 여러분은 만약 ‘위대한 인물’이라 칭송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떤 태도로 그를 대하실 건가요? 물론 우리 시대는 옛날처럼 ‘위인’이라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흔치 않기는 하지만, 그래도 인류 사회에 기여했다거나, 훌륭한 업적을 이루어낸 사람들을 찾을 수 있지는 않을까 싶은데요. 어찌됐건 그런 사람들을 대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체로 긴장을 하곤 합니다. 우선 그 권위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거나 때로는 높이 우러러보기도 하죠. 그러면서 우리 눈앞에 보이는 위대함이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땅에서 바로 솟은 듯이 보게 됩니다. 말하자면 위대함의 정도가 높을수록 우리는 그 인물에 대한 평가를 실제 이상으로 신화화하게 되는데요. 이러다가 전통이 형성되면 아예 그 인물을 신격화하기도 합니다.
약점이었기에 가능했고 그래서 감동적
그러나 그들의 위대함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땅속에서 솟아오른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삶에서 빚어진 것입니다. 위대함은 타고난 강점을 확대하고 증폭한 결과라기보다는 약점과 씨름하면서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사실 타고난 강점이 있다면 그걸 믿고 그만큼 노력을 덜 하게 되기 마련인데요. 그래서 위대함을 이루어내는 것은 오히려 더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약점은 약점이지만,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갈고 닦아 위대함을 향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의 감동을 일으키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왜 우리가 남에게서만 감동을 받아야 하나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서 감동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약점을 슬퍼할 일은 아닙니다. 약점이 오히려 위대함에 이를 가능성은 훨씬 더 많습니다. 물론 근거 없이 격려만 하거나 바른 생활 태도를 권장하려는 구태의연한 도덕적인 교훈은 전혀 아닙니다. 위인들이 그 증거이니까요. 정신분석학자인 루 살로메도 그의 책 <깨달음 이후 빨랫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진정 위대한 존재로 느껴지는 인물을 대할 때, 우리는 그 앞에서 얼어서 긴장하기보다는 그가 오로지 자신의 약점을 통해서 그 위대성을 성취했으리라는 사실에 감동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