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절대로 없다.’ 이 말은 절대적일까요? 만일 절대적이라면 절대적인 것이 있으니 이 말은 틀린 것입니다. 반대로 그 말이 절대적이지 않다면 절대적인 것이 있다는 것이니 그 역시 틀린 것입니다. 말장난처럼 들리기도 하는데요. 이유인즉, ‘절대’라는 것은 마주하기를 끊는다는 것이니 이렇게 해도 꼬이고 저렇게 해도 꼬이기 때문입니다. 미궁, 딜레마라고 하는 혼동의 상황입니다. 우리 삶에서 이런 경우가 적지 않은데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음과 문제, 대답과 해답]
일반적으로, 물음은 대답을 향합니다. 대답을 얻으면 물음은 목적을 달성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 대답이 문제를 해결해준다면 해답으로 등극합니다. 이로써 물음은 종결됩니다. 물음과 해답의 방정식입니다. 그러나 삶에서는 그런 방정식이 적용되는 범위가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 말입니다. 20세기 현대미술을 풍성하게 후원한 이유로 ‘거장을 알아본 거장’이라는 별명을 얻은 독일계 미국 시인 거투르드 스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해답은 없다. 지금까지도 해답이 없었고 앞으로도 해답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유일한 해답이다. 거투르드 스타인
‘해답이 없는 것이 해답’이라니, 말장난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심지어 냉소주의나 패배주의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삶에 있어서는 오히려 이 말이 더 적합합니다. 어째서 농담 같은 말이 깊은 지혜가 될까요? 해답이 없다는 것을 해답으로 삼게 되면서 ‘물음과 대답의 관계’를 ‘문제와 해결의 관계’로만 생각했던 우리의 편협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물음’을 우리는 무조건 ‘문제’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물음이 question이라면 문제는 problem입니다. 그런데 물음은 대답, 즉 answer를 기다릴 수 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은 대답이 없겠지요. 말하자면 물음은 대답 없음을 견딥니다. 그러나 문제라고 하면 그 상태로 두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해답 solution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물음과 대답의 관계를 문제와 해결의 관계로만 보려는 데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습니다. 해결에 이르러 해답을 얻어내야만 직성이 풀리도록 길들어져 왔습니다. 그래서 어떤 대답이라도 얻지 못하면 안달하게 됩니다. 물음이 아닌 문제를 보도록 몰려져 왔기 때문입니다.
물음은 대답을 향하기는 하지만 그 사이의 거리를 즈려밟고 가는 삶의 길입니다. 삶의 물음은 대답을 얻는 듯해도 이내 그 대답에 대한 물음이 다시 일어납니다. 삶에서 우리가 겪는 것이 이미 그러합니다. 어제의 대답이 오늘의 대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어서 일어나는 물음들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어떤 물음에 대한 대답에 대해 또 물음이 던져진다면 그 물음은 앞의 물음보다 더 크고 깊은 물음일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앞의 물음은 작은 물음이 되니 큰 물음 안에 들어가 버리게 되는데요. 말하자면 물음이 꼭 대답을 얻지 못해도 더 큰 물음 안에 들어가니 더 이상 물음이 아니게 됩니다. “해답이 없다는 것이 해답”이라고 한 거트르드 스타인의 말도 이렇게 풀어볼 수 있을 듯합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벨포경의 통찰에 잠시 머물러 봅니다.
우리가 최상의 진리라고 여기는 것은 / 절반의 진리에 불과하다. 어떤 진리에도 머물지 말라 / 그것을 다만 한여름 밤을 지낼 천막으로 여기고 그곳에 집을 짓지 말라 / 왜냐하면 그 집이 당신의 무덤이 될 테니까. 그 진리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할 때 / 그 진리에 반박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 슬퍼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히 여기라. 그것은 침구를 거두어 떠나라는 / 신의 속삭임이니까 벨포 경
해답의 위치에서 군림해오던 진리에 대해 돌이켜 생각해 보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많은 진리들을 해답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이면서 살아왔는가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진리라는 이름으로 군림했던 해답들이 우리를 억누르고 옥죄었던 경우가 적지 않은데요. 올바른 길이라고 하면서 무조건 따를 것을 강요했고 이에 저항이라도 할 경우 억압과 핍박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인간은 진리의 이름으로 무수한 무덤을 만들어 왔습니다. 진리를 명분으로 잔인한 폭력이 자행되었고 급기야 무수한 전쟁을 치러야 했고 또 치르고 있다는 것이 좋은 증거입니다. 그러니 해답이라는 자리에 군림해온 진리라는 것에 대해 회의하고 반박하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런 생각에 오히려 감사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러한 회의와 반박은 저 위의 ‘해답’ 이야기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물음’으로 우리 눈을 돌리게 합니다. 불안하지만 물음에서 자유는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삶의 뜻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